| 시간은 긴 것이다 | |
|---|---|
| 작자 | 미상 |
| 출처 | 태양의 탑 외전 |
1. 개요
태양의 탑의 외전이다.
고대 이스나미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낯선 인물들의 등장과 난해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해석할 거리와 떡밥이 많은 외전이기도 하다.
2. 내용 및 해설
시간이 흐른다.
여자는 한참 동안, 혹은 아주 잠시, 석벽에 걸린 벽걸이 융단 앞에 서 있었다. 융단은 바다처럼 넓었다. 융단 끝자락의 금빛 글귀가 감춘 황금이 하루 종일 이 자리에 떨어진 햇빛보다 많을 정도로.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 안에 영원이 들어 있지 않음을 알기에.
태양은 이곳, 기도의 방을 떠나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다. 방 귀퉁이에 차가운 그림자가 내려앉자 융단은 이제 테두리만 빛나고 있었다. 거칠게 발굽을 들어 올린 말과 은빛 갑주의 기마병이 네모진 창살 속에 갇혀 있었다. 찰나였지만 또한 영원히. 짧은 영원이 지나가자 남은 것은 어둠뿐이었다. 바위벽에서 수백 년 묵은 냉기가 흘러나왔다.
여자는 기도의 방을 떠나 계단을 내려갔다. 들리는 것은 자신의 발소리뿐이었다. 그 소리에 의식적으로 생각을 집중했다. 그렇지 않으면 매 순간이 수천 개의 인상으로 화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을 덩어리로 느낀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을 눈금으로, 아니, 무한히 잘게 쪼개지는 가루로 보았다. 벽걸이 융단을 바라 보며 순간을 세는 것만으로도 생애를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임무를 위해 깨어난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눈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물과 시간을 분해하지 않고 흐릿한 덩어리로 보아 넘기기 위해 노력했다.
긴 잠에서 깨어난 웨인단이 등장한다.
"어서 오시오."
"오셨군요."
옛 친구들과 인사하는 동안 한 젊은이가 다가와 말없이 여자를 맞이했다. 여자는 그를 몰랐다. 기억 속에서 편린을 찾아보고자 젊은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회색이 은은히 퍼진 동공은 어딘가 익숙했다. 그러나 무엇도 정확하지 않음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젊은이의 어깨 너머로 휘장을 쳐서 가린 벽이 보였다. 그 뒤로 높은 천장과 기둥들이 이어졌다.
"오랜만입니다, 웨인단."
그 사이 알던 사람들은 조금씩 변했다. 치렁치렁하던 머리를 짧게 자른 나르본은 잘 웃던 옛 모습보다 훌쩍 어른이 된 듯했다. 하긴, 언제는 어른이 아니었던가.
"오랜만이라는 말은 언제나 필요가 없지."
나르본의 인사에 답하며 웨인단은 웃었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 몇 사람이 따라 미소를 지었다. 회색 눈의 젊은이가 웨인단을 검은 돌 일곱 개가 놓인 자리로 안내했다.
잠에서 깨어난 웨인단은 옛 친구들과 회색 눈의 낯선 젊은이, 그리고 나르본과 만나게 된다.
다시 보니 기억이 새로운 돌들이었다. 새로 날카롭게 다듬은 타로핀 바위를 이 자리에 놓던 것이 어제의 일 같다. 하늘에 일곱 별자리가 있기에 모두 일곱 개. 웨인단이 자리를 비운 사이 돌들은 조금씩 닳아 있었다.1
웨인단이 앉은 자리는 예전에 륀 유이치가 앉았던 '파비안느의 검' 자리였다. 그건 곧 륀이 이곳에 없다는 뜻이었다. 웨인단은 앉은 채로 돌의 옆면을 더듬었다. '륀 유이치, 파비안느의 가호를'이라는 새김 글자가 손끝에 걸렸다.
"유이치는 잠들어 있어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요."
웨인단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레 클로슈' 엘리종이 말했다. 고개를 들자 엘리종이 꿈에서 본 모습 그대로 흰 옷을 입고 '시간의 강'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세월의 흐름은 막지 못하지만 변하지 않은 사람의 존재만은 위로였다. 언제인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잠에서 깨어나 돌아왔던 어떤 날,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었던 기억이 났다. 그 한 명도 엘리종이었다.
"못 보던 사람이 있으니 소개를 해야지."
'닫힌 문' 자리에 앉은 히와칸 옹스트는 일곱 장로의 모임을 가장 오래 지켜온 자였다. 여섯 번이나 잠들었지만 언제나 돌아왔다. 검은 표범의 등처럼 빛나는 타로핀 광석조차 닳아 변하더라도 여기 앉은 사람 중 몇 명은 여전히 살아나갈 것이다.
일곱 별자리를 상징하는 일곱 자리가 있으며 그곳에서 일곱 장로의 모임이 열린다. 누군가가 잠들 때마다 자리의 주인은 바뀌곤 한다.
파비안느의 검 자리 : 웨인단 -> 륀 유이치 -> 웨인단
시간의 강 자리 : 엘리종
닫힌 문 자리 : 히와칸 옹스트
긴 잠에 들면 무조건 깨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리라를 탄현하는 소리가 천장 위로 올라갔다. 공기의 무게는 시간의 무게였다. 웨인단에게 공간이란 마치 바람처럼 양감이 없는 존재였지만, 시간은 보이지 않는 무게를 더해나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다른 장로들처럼 웨인단도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것처럼 자신을 기억했다. 사실이 아님을 알지만, 그 이전의 자신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기억이란 시간과 섞여 변하고 단순화되다가 마침내 지워져버린다. 사라진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누군가는 그것조차 바라보고 있을까? 절대자의 눈에는 그 파편들이 보일까?
웨인단의 옆자리부터 소개가 돌아갔다. 낯선 얼굴,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꿈속의 누군가와 비슷한 얼굴들이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유동하던 웨인단의 의식이 특정 공간에 속해 있는 존재들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사라진 얼굴들이 문득 의식 위로 고개를 내밀곤 했다. 웨인단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불안정했지만 무엇도 두렵지는 않았다.
웨인단과 우정을 맹세했던 카니크 페라루하는 웨인단이 잠들고 얼마 되지 않아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지금 페라루하의 자리는 누이동생인 카니크 지지에가 맡고 있었다. 페라루하는 웨인단이 다시 잠들 때까지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옹스트는 페라루하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영의 육성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현재 웨인단은 어른 이전의 기억을 잊어버렸다. 긴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는 기억 혼선을 겪는다.
고대 이스나미르 인들은 영의 단계를 높이기 위한 모종의 과정을 거친다.
지지에의 얼굴에 페라루하의 흔적은 없었다. 어쩌면 웨인단의 머릿속에 든 페라루하의 기억도 실제와 무관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잠들었던 수백 년 동안 웨인단의 꿈속에 나타났던 것들은 엉킨 그물 같아 쉽게 구별이 되지 않았다.
소개가 끝나자 웨인단이 말했다.
"제가 돌아왔던 날은 늘 지금처럼 힘든 시기였지요."
엘리종이 처음의 젊은이를 불러 석판을 가져오게 했다. 침묵의 장막을 부르려는 것이다. 환영주가 섞인 잉크를 찍은 타로핀 펜촉이 석판 위를 미끄러져 갔다. 곧 석판은 칼로 새긴 것 같은 글자들로 가득 찼다. 엘리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둘러앉은 일곱 사람의 한 가운데에 석판을 내려놓았다. 이제 타로핀의 방은 침묵에 잠기고 어디로도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다.
옹스트가 웨인단에게 지도와 표식을 건넸다. 일곱 장로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돌로 된 패는 손을 타지 않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지도는 이 성의 내부를 그린 것으로 긴 잠에서 깨어난 자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웨인단은 지도를 펼쳤다. 단순한 선들을 들여다보는 가운데 옛 기억의 일부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들기 직전에 머물렀던 곳, 이스나에의 방에 시선을 멈췄다. 지도에서 그 방은 지워지고 없었다.
기억 혼선을 겪는 이를 위해 지도와 표식을 준다.
웨인단이 잠들기 전에 존재했던 이스나에의 방은 웨인단이 잠든 후 사라졌다.
헬 위스2 나르본은 일곱 별자리가 새겨진 푸른 겉옷을 입고 있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웨인단을 위해 크림이 든 수프와 과일즙, 약간의 환영주가 차려져 있었다. 따뜻한 과자 몇 개가 말상대를 하는 나르본을 위해 놓여 있었다. 녹색 휘장을 두른 거실이었다. 웨인단은 숟가락을 들다 말고 생각에 잠긴 것처럼 동작을 멈추었다.
"나르본."
웨인단은 나르본의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그런 인연은 드물었고, 두 사람 모두 그 인연을 귀하게 여겼다. 이미 수백 년 전의 일이긴 해도 나르본은 웨인단에게 검의 기초를 배웠다. 그때만 해도 웃고, 울고, 화내던 나르본의 얼굴은 이제 웨인단과 마찬가지로 평온해 보였다.
"멈추지 않는 비, 기억해?"
나르본은 고개를 끄덕였다. 멈추지 않는 그 비는 멈추었다. 웨인단의 삶과 맞바꾸어서. 그날 웨인단은 스스로 죽음일지도 모를 잠을 택했다. 그때 깨어 있던 자들 중 죽음 대신 잠을 택할 수 있는 영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웨인단뿐이기도 했다. 양 뺨을 눈물로 적시면서 웨인단의 옷자락을 놓지 않던 나르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때만 해도 나르본은 시간을 받아들일 줄 몰랐다. '백년은 하루와 같이 지나간다, 나르본.' 웨인단은 나르본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하루가 가끔 백년처럼 길듯이 말이다.'
영의 단계가 높으면 죽음 대신 수백 년짜리 긴 잠을 택할 수 있다.
웨인단은 '멈추지 않는 비'를 강제로 멈추고, 죽음 직전의 위기에서 긴 잠을 택했다.
웨인단의 숟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그릇 속으로 들어갔다가 반쯤 채워져서 올라왔다. 굳어진 수프가 숟가락 위에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웨인단은 숟가락을 바라보다가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덜그럭, 소리가 났다. 무생물에게 갓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어색한 움직임이었지만 며칠이면 괜찮아지리라. 웨인단이 중얼거렸다.
"엘리종의 솜씨군."
나르본은 그런 웨인단을 바라보며 시간의 먼지 속에 가라앉아 있던 불안감이 머리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일곱 장로들은 어째서 웨인단을 이토록 일찍 깨웠을까? 아직 수십 년은 더 잠들어 있어야 했는데.
"내가 깨어날 때는 항상 위기였지."
나르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웨인단이 말했다. 남의 이야기인 양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두 번 일어난 일은 백 번도 일어나는 법이지.' 마음속의 소리가 울렸다.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나르본은 결국 말하고야 말았다. 그는 아직 시간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었는가? 웨인단은 예전처럼 엄격한 표정을 짓는 대신 빙그레 웃었다.
"옷이 잘 어울리는구나."
웨인단은 알고 있었다. 왜 자신이 부름을 받았는지. 페라루하가 왜 떠나야만 했는지. 나르본의 눈이 왜 어둡게 변했는지.
"그리고 엘리종이 이 수프를 만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도."
하고 웨인단은 말했다.
웨인단은 항상 세상에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긴 잠에서 깨어났으며, 이번에도 그러한 경우다.
웨인단이 수십 년 일찍 깨어난 것, 페라루하가 웨인단이 잠든 후 얼마 되지 않아 긴 여행을 떠난 것, 나르본이 불안에 잠긴 것 모두 이번 위기와 관련이 있다.
정원에는 밤새 눈이 내려 있었다.
모 제노인은 암흑 아룬드 태생답게 머리도 옷도 검었다. 눈을 들여다보니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안정세에는 접어든 듯했다. 추운 정원에서 오래 기다린 듯 상자를 쥔 손이 푸르스름했다.
"여섯 밤이 지난 후로 정했습니다. 어젯밤에는 푹 쉬셨는지요."
"모두 일곱 밤이로군요. 적절한 숫자는 좋은 결과를 선사하겠지요."
웨인단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노인이 상자를 건넸다.
"일곱 번째 밤을 위해서."
"엘리종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모 제노인이 웨인단에게 상자를 건넨다.
웨인단은 상자를 열었다. 나무 이음새가 달그락거리다가 떨어졌다. 흰 천을 벗겨내자 옷의 붉은 광택이 피부에 희미하게 어렸다. 옷을 꺼내는 대신 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단단한 손이었다. 살갗은 생장이 끝나지 않은 나뭇가지처럼 물기 어린 빛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예하게 단련된 무기의 빛이었다. 살아 있는데도 변화는 어느 순간 멈추었다. 손의 영혼은 긴 세월 기억을 흡수해 나무뿌리처럼 굳어졌다.
그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겨드랑이 언저리에 닿는 붉은 머리카락이다. 언제부터인가 자라지 않아서 잘라내지도 않았다. 적어도 수백 년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아룬드는 세상 모든 것의 변화와 반복을 나타낸다고 했다. 열네 아룬드가 흐르면 한 해가 끝난다. 일곱 해가 흐르면 제사의 아룬드가 돌아오고 제사의 아룬드가 열네 번 돌아오면3 잠들지 못한 아이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는다. 자신은 언제 잠들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났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은 삶을 잇는 아교였다. 자신의 삶은 수없이 이어 붙여졌다. 만약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군데군데 구멍이 난 기괴한 탑과 비슷할 것이다.
옷이 펼쳐졌다. 웨인단의 옷은 항상 붉었다. 오늘처럼. 이 옷을 만든 사람은 지금쯤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것을 보고, 자신이 만들었는지도 모른 채 눈이 휘둥그레지는 아이일지도 모른다. 이 옷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찬란한 붉은 색. 노을과 용암의 색. 그 위에 수놓인 수천 개의 별들을.
모 제노인이 준 상자에 든 것은 붉은 옷이다. 웨인단의 옷이며 웨인단이 '붉은 옷의 아스테리온'이라는 이명을 가진 이유이기도 하다.
아룬드 세계관에는 환생이 존재한다. 죽으면 환생을 거친다.
웨인단 역시 몇 번의 환생을 거쳤다. 다만 웨인단의 환생은 일반적인 윤회와 다르다. '되돌아오는 자'라는 이명이 가리키듯, 그녀가 되풀이하는 삶은 그녀의 의지 혹은 타인의 의지에 달렸다. 자신이 원할 때 죽고, 자신 혹은 타인이 원할 때 깨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겪는 죽음이란 수백 년짜리 잠과 비슷하며 진짜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
이토록 아름답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 웨인단은 입고 있던 수의 같은 흰옷의 끈을 하나하나 끄르고 팔을 빼냈다. 손을 놓자 흰옷은 그림자인 양 발치로 떨어졌다.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게 붉은 옷을 몸에 대어 보았다. 이 옷을 스쳤던 수많은 생명의 비명이 귓가를 맴돌았다. 목덜미를 감싸는 감촉, 종아리를 스치는 서늘함, 손목을 조이는 끈의 안정감, 너무나 익숙하다.
"여전히 잘 어울려요."
문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웨인단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웨인단은 돌아보지 않았다.
기억이 서서히 살아났다. 가장 특별한 시절을, 그때의 기억을 지배했던 목소리였다. 이 긴 시간이 흐르고 깨어난 그녀가 옷을 되찾아 입기를 기다려 돌아왔던가.
"메로드 데지레.4"
"유리아나키드 인릴.5"
"아니오."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다. 틀림없이 인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인릴은 여기 있을 수 없다. 자신의 기억이 그를 불러냈는가? 웨인단은 돌아섰다.
웨인단이 붉은 옷을 입고,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웨인단의 연인인 유리아나키드 인릴의 목소리였으나 남자는 자신이 인릴이 아니라고 말한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실루엣만으로도 인릴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웨인단은 눈을 감았다. 무엇을 기대했던가.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문이 닫히며 빛이 걷혔다. 두어 발짝 걸어 들어온 사람을 보았다. 짧은 머리와 회색 눈동자는 어느 모로 보나 인릴과는 달랐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웨인단을 맞이하던 날에는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기에 지금 보이는 사람과 그때의 젊은이가 하나로 합쳐지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제가 놀라게 했군요. 그렇게 놀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젊은이가 말하자 웨인단의 몸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긴장해 굳어졌다. 이질적인 감정이 밀려오며 판단력에 혼란을 일으켰다. 수백 년은 될 시간차가 종이 한 장처럼 얇아지다가 마침내 찢어져버릴 듯했다. 웨인단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지요?"
"류지 로 주하."
기대했던 이름은 아니었다.
"데지레라고 불러도 되나요?"
주하가 갑자기 묻는다. 동시에 눈앞에서 시간이 구부러지는 것이 보였다. 조각난 시간이 폭풍으로 변하고 웨인단은 지금 선 곳을 잊어버렸다. 푸른 풀이 융단처럼 깔렸던 계곡이 되살아났다.
목소리의 주인은 초반 부분, 웨인단을 맞이했던 낯선 회색 눈동자의 남자다. 남자의 이름은 '류지 로 주하'다.
기도의 방 벽걸이 융단 앞에서 맞잡았던 손이 생생해졌다. 해가 저무는 순간이면 떠오르곤 하던 금빛 테두리를 잡아보려 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해 끌어안았고, 얼굴에는 작은 금속들이 와 닿았고, 입술에는 옷깃이 스쳤던 날들이 되살아났다. 심장이 빨라지다가 다시 느려졌다. 사이를 두고 그녀를 감싸 안았던 긴 팔의 온기가 아직도 몸속을 흐르고 있었다.
웨인단의 입술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고 주하가 다가왔다. 시간의 강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물고기처럼 솟구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다른 기억도 되살아났다. 웨인단은 깨어났었다. 네 번이나. 히와칸 옹스트 다음으로 많은 횟수였다. 그보다 오래된 자들은 이미 다른 생명이 되어버렸다.6
주하가 밟고 선 채색 대리석 위에 그림자가 무늬를 그렸다.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분홍색의 사각형들이 겹쳐진 위로 가죽 끈 샌들과 드러난 발가락의 윤곽이 어슴푸레했다. 인릴은 세르네즈의 전사였다. 그는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눈밭에서도 맨발에 샌들을 신었다.7 니스로엘드의 전사인 데지레는 단단한 밑창을 댄 가죽신을 신곤 했다. 늘 발목까지 덮이는 신발이었다. 인릴은 언젠가 데지레의 발목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데지레. 웨인단은 나의 별명이지요."
언젠가 했던 그대로의 대답이었다. 주하가 입술을 움직여 데지레, 하고 발음했다.
웨인단은 과거 인릴과의 추억을 회상한다. 동시에 자신이 네 번이나 잠들었다 깨어났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불이 켜졌다. 길고 어두운 복도에 단 하나의 등불이 켜져 단 하나의 기억을 비추었다. 웨인단은 그 불빛 아래로 나아갔다.
회색 눈동자가 휘장처럼 넓었다. 손을 내밀었다. 붉은 옷소매 속에서 얼어붙은 손목이 있었다. 그 위에 손이 겹쳐졌다. 마주잡았다. 사람의 껍질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촉이었다. 약간 따뜻하고, 손끝에 걸리지 않는 수많은 주름들이 있었다. 살아 있어서. 주하의 옷자락이 구겨졌다. 웨인단이 건 목걸이에 매달린 추가 허공을 가로질러 주하의 옷에 붙은 은장식에 부딪치며 뎅그렁 소리를 냈다.
수백 년이 먼지처럼 밟혀 사라졌다. 흩어져 날아가는 가루가 웨인단의 눈 속에 비쳤다. 주하는 자신에게도 보이는 것처럼 웨인단의 눈을 주시했다. 이윽고 맑아진 웨인단의 눈 속에서 빛이 떠올랐다. 천장에서도 빛이 내려왔다. 하나8는 다른 하나9보다 수십 배나 오래된 생명이었다. 그러나 빛은 어제 갓 태어난 생명과 마찬가지로 둘을 똑같이 비추었다. 순간이 영원인 것처럼 껴안은 두 사람을.
류지 로 주하는 인릴 유리아나키드의 환생이다.
두 사람은 재회를 누리며 포옹한다.
이상한 일이었다. 왕은 선왕을 조금도 닮지 않았다.
웨인단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자 엘리종이 눈짓을 했다. 웨인단은 천천히 절을 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나에게서 듀플리시아드10의 모습을 찾는군요."
검은 눈이 웃었다.
"많이들 잠들었지요. 떠났고요. 나만 남겨 뒀어요."
왕의 품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웨인단이 내려다보자 왕이 말했다.
"혹시 르 필을 기억해요? 고조부께서 키우시던."
머릿속의 수면이 흔들리는 것 같더니 기억이 떠올랐다. 간단한 대답이 긴 시간을 헤치고 솟아올랐다.
"알지요."
미소가 뒤따랐다.
"르 필은 아주 옛날에 숲으로 돌아갔지요. 예니체트리의 고양이를 더 오래 잡아두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르 필은 이 '키티아'를 십 년 전쯤에 데려다주고 갔어요."
웨인단은 하품을 하는 작은 고양이를 보았다. 세월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 사는 동물이었다.
"키티아는 아직 어려요. 그래서 지금은 나를 따라 다녀요. 그렇지만 이십 년쯤 더 지나면......."
말끝을 흐린 작은 왕은 웃었다. 고양이가 그의 손에서 뛰어내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웨인단은 엘리종과 함께 왕을 접견한다.
예니체트리의 고양이 '르 필'은 웨인단이 잠든 사이에 왕의 곁을 떠났고, 10년 전쯤에 '키티아'라는 또다른 예니체트리의 고양이를 데려다주었다.
기둥 사이에 긴 옷을 걸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옷자락이 흔들리자 마치 발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음악이 바람소리에 섞여 불어왔다. 거인처럼 훤칠했던 금발의 젊은이가 그들 사이에 서 있던 생각이 났다. 은 가슴가리개와 두꺼운 펠트 망토를 걸치고 흰 어깨는 단단하고 억세던, 마치 아름다운 야만인 같던 청년왕은 이미 다섯 세대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왜 왕은 오래 살지 못할까요?"
마치 웨인단의 마음속을 들여다 본 것처럼 소년 왕이 미간을 좁혔다. 웨인단은 왕을 보았다.
"왕이시여, 이름을 듣게 해주십시오."
마주 선 왕을 내려다보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붉은 옷자락이 펼쳐졌다. 엘리종이 그 뒤에 환영처럼 서 있었다.
"나는 루아 루이즌11. 그대를 위해 대답합니다."
왕이 검은 소매에서 손을 꺼내 내밀었다. 웨인단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잠시 후 왕의 손이 거두어지자 웨인단의 손에는 온기 어린 붉은 보석이 남아 있었다. 어디선가 떼어낸듯 뒷면과 테두리에 접착자국이 남아있는 물건이었다. 웨인단이 묻는 눈으로 바라보자 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것이잖아요. 웨인단."
웨인단은 자신이 의무를 위해 부름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의무는 갚지 못한 빚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소년 왕 루이즌. 오래 살지 못할 테지. 새로운 흰 꽃이 피어날 때면 동백처럼 지겠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은 웨인단이 기억하는 듀플리시아드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왕은 늘 그녀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때를 알아 숲으로 되돌아가는 예언자의 고양이처럼. 노란 망토의 예언자 예니체트리도 그렇게 긴 잠으로 되돌아갔다. 다른 생명들이 수없이 잠들고 깨어나는 동안에도 예니체트리는 부름이 올 때까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웨인단은 이 세상에 발을 디뎠고, 되풀이된 만큼이나 충실하게 할 일을 알며, 과거와 현재의 뒤섞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실제로 과거와 현재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웨인단도 수백 년 전과 조금밖에 다르지 않았다. 곧 여행을 떠날 때가 다가오는 오래된 생명이었다.
왕들은 모종의 이유로 오래 살지 못한다.
루이즌은 웨인단에게 붉은 보석을 돌려준다. 왕들은 늘 웨인단이 깨어날 때마다 검을 돌려주었으나 이번에는 검에 붙어있던 보석만 돌려주었다.
현재 예니체트리는 긴 잠에 빠져있다.
복도 벽에는 위아래로 같은 무늬를 넣은 천을 발랐다. 닳아서 반들반들한 바닥이 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열 걸음마다 벽에 고정된 빛나는 막대기들 때문이다. 하늘이 밝아오는 때였기에 빛은 희미하게 줄여져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줄어들다가 아침빛이 복도에 스며들면 저절로 꺼졌다. 웨인단은 이것을 만들어낸 사람이 친구였다고 느꼈으나 그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은 어디로 가려 하는가.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찾아냈다. 복도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지만 넓은 성을 사방으로 가로질렀기에 자신이 선 곳이 어디인지 얼른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 복도가 어디로 통하는지 기억하는 것은 은밀한 감각이었다. 불안감과 약간의 두려움이 희미한 여명이 깃든 복도를 감돌았다.
"웨인단, 그대도 기억하겠지요?"
앞서가던 카니크 지지에가 멈춰서서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웨인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지에의 검푸른 머리카락도 끄덕여졌다.
"그러면 가는 겁니다. 오감을 줄이고서, 무(無) 속을 걸어가듯이."
웨인단이 지지에를 스쳐 앞으로 나아갔다. 검푸른 머리와 옷 사이로 희디흰 옆얼굴이 비껴갔다.
"저는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이번에는 뒤에서 지지에가 말했다. 웨인단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겨울 풍경이 검은 장막 속에 감춰졌다. 이어 귀를 닫았다. 소리들이 스르르 사그라졌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발을 내딛었다. 마치 허공을 내딛는 듯했다.
「걸어갑니다.」
「인도자의 별이 그대를 인도하기를.」
지지에의 마지막 말은 묵직한 공기를 간신히 뚫고 들려왔다. 웨인단이 한 말도 그랬을 것이다.
카니크 지지에와 웨인단이 어디론가 향한다. 웨인단은 불투명한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한다.
카니크 지지에는 끝까지 동행하지 않고, 웨인단 홀로 알 수 없는 무(無)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의지를 곧게 세우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웨인단을 인도하는 것은 직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수십 번 지워지고 다시 새겨진 기억의 석판이 어느 순간 획득한 새로운 정신이었다. 오감을 접어버리자 그 새로운 정신은 무(無)를 밝히는 섬광처럼 시공간을 뚫고 날아갔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데도 심한 운동감이 물리적인 육체를 휩쌌다.
공기, 또는 주위의 시공간에서 낯선 압력이 생겨나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재재거리는 것도 같고 웅얼거리는 듯도 한 미묘한 소리들이 났다. 눈앞의 빛이 한순간 일그러지며 흔들렸지만 곧 단단하게 곧추섰다.
갑자기 시공간이 한없이 넓어지면서 웨인단은 통제력을 잃었다. 아주 어린 생명처럼, 자신이 속한 공간의 속성을 모른 채 자의가 아닌 정지에 순응했다. 웨인단은 높은 곳을 올려다보았다. 수십만, 수백만의 얽히고설킨 고리와 사슬이 보였다. 자신과 이어진 가느다란 끈도 그 그물더미 속으로 숨어들어 곧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보았다.
이곳은 파괴된 자리였다. 그래서 비밀의 아주 작은 조각이 드러나 있었다. 그런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부분일 뿐이었다. 웨인단의 기억이 인도한 이곳은 지도에서 사라진 방이었다.12 이 자리에서 만나야 할 자가 있었다.
「나에게 무슨 볼일인가?」
갑작스런 물음이 들이닥쳐 울렸다. 웨인단은 짐작한 듯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되물었다.
「너야말로 이곳에 무슨 볼일인가?」
「나는 빚을 받으러 왔지.」
공기덩어리 같은 것이 대답했다.
웨인단은 미지의 시공간에서 '공기덩어리'와 재회한다.
웨인단은 바로 선 채 그것을 주시했다. 흐느적거리다가 곧 합쳐지고, 다시 갈라지며 제멋대로 변하는 공기덩어리였다. 빚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그 덩어리는 보랏빛 손바닥으로 변해서 웨인단의 앞에 내밀어졌다. 고목처럼 옹이진 마르고 긴 손가락이 처음엔 다섯 개였으나 점차 늘어나 열 개가 되었다. 그러더니 반으로 갈라져 두 개의 손으로 변했다. 두 손은 쉭 합쳐져 깍지 낀 모양을 만들었다.
「이거 즐거운걸.」
공기덩어리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울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의 취향을 맞추기라니.」
「네 빚은 곧 내 빚이야. 그건 알고 있겠지?」
웨인단의 말에 공기덩어리는 다시 둘로 갈라진 손이 되어 좌우로 으쓱하는 모양을 취해 보였다.
「모를 리가 있나. 그리고.......」
말을 이으려는 듯 손바닥이 위로 올라갔다. 웨인단이 그가 할 말을 대신했다.
「오늘이 재회의 날이 아닌 것도 알지.」
손바닥은 다시금 으쓱하는 모양을 취했을 뿐이었다. 웨인단이 말했다.
「나는 보아야겠다.」
그 말에 공기덩어리가 펼쳐지더니 커다란 창문으로 변했다.
「열어라.」
열렸다. 웨인단은 훌쩍 몸을 띄워 그 안으로 들어갔다.
공기덩어리가 변한 창문 너머로 웨인단이 넘어간다. 이윽고 그녀는 4개의 장면을 보게 된다.
말이 달리고 있었다. 은 갑주를 걸친 기마병이 올라타고 있었다. 갑옷과 똑같은 빛깔의 머리카락이 투구 밖으로 흩날렸다. 계절은 연둣빛 프랑드였다. 발굽에 튀긴 흙탕물에서도 희미한 싹의 냄새가 풍겼다.
생명의 기운이 가득했다. 세차게 밀려드는 공기는 파도의 날개 같았다. 갑자기 속도가 줄어들었다.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울렸다. 동시에 얼굴을 후려치던 바람도 멎었다.
땀으로 범벅된 상기된 얼굴이 투구 밑에서 나타났다. 가닥가닥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젖히자 은빛 눈썹과 매서운 눈이 나타났다. 그러나 머리카락과 눈매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안개에 싸인 듯 어슴푸레했다.
날개를 퍼덕이는 네 발굽 짐승이 땅을 가볍게 차면서 반은 나는 듯이 다가왔다. 흰 털이 투명에 가깝도록 빛났다.
"라이스헬로프, 그대의 친구가 되겠다."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성한 계약을 축복하는 태양이 대지에 충일해졌다. 이 순간은 부지런한 손들에 의해 셀 수 없이 많은 피륙의 올들에 응축되어 지금까지 자취를 전해 왔다. 그러나 그 피륙들은 이미 이 순간과 아주 작은 연관밖에 없음을 웨인단은 잘 알고 있었다.
웨인단이 본 첫번째 장면.
여전사 파비안느가 말을 타고 달리고 있다. 그때 날개를 가진 하얀 말 라이스헬로프가 다가오며 파비안느와 라이스헬로프는 친구가 된다.
수십 개의 면과 각으로 이뤄진 빛나는 돌은 하나의 생명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일곱 밤낮을 벼린 칼날에서 떨림이 일었다. 긴 생명만큼 책임을 의미하는 검이었다.
그러나 방금 칼자루에 박힌 붉은 돌을 만지작거리는 어린 처녀 데지레의 손가락에는 세월의 냄새가 없었다. 오늘 그녀는 처음으로 영을 육성해 생명을 연장시켰고, 그래서 이 검을 소지할 자격을 부여받았다.
처음은 작다. 그 작은 깨침으로 문을 찾는다. 누군가가 허용한 삶 속에 갇혀 있다가 첫 생명 연장을 경험하는 순간은 경이롭다는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살아가며 겪은 어떤 감격과도 비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의 삶은 전부 잊어버릴 정도로 강렬하다. 생명과 시간의 비밀에 예기치 않게 맞닥뜨린 당혹감은.
그러나 그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선 이 모든 것을 다시금 완전히 잊어버릴 만큼 큰 변화가 필요했다. 웨인단은 그런 과정을 네 번이나 거쳐 왔다.
지금 웨인단에게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검에 박힌 붉은 보석뿐이었다. 검의 모양은 확실하지 않았고 그것을 쓰다듬는 어린 처녀의 뒷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웨인단의 손과 매우 달라 보이는 그 손만은 오래된 추억처럼,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빛을 냈다.
웨인단이 본 두번째 장면.
처음으로 영의 단계를 높여 죽음 대신 생명을 연장 받은 데지레는 붉은 보석이 박힌 검을 부여받았다.
그 비였다.
누군가가 비를 맞고 있었다.
웨인단은 뭔가 말할 듯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이윽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에게 닿지 않는 비를 보는데도 몸이 떨렸다.
비는 바닥을 때리고 작은 물줄기들을 그리며 흘러갔다. 젖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이 무겁게 젖은 옷 속으로 흘러들었다. 희고 큰 발을 감싼 샌들의 끈은 축 늘어져 있었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모를 비.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를 그.13 비가 그를 적셨음을 알면서도 그의 회색 눈이 다른 물기로 젖어 있음을, 웨인단은 알아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잘 알아보았다.
이층 창의 덧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을 것이다. 잘 알고 있다.
웨인단이 머릿속으로 그렸던 풍경과 많이도 비슷했다. 가슴 아프게도. 쉬지 않고 내리는 비와 땅에서 오른 물안개로 흐렸건만, 또렷이 보고 싶지 않은 이 풍경만은 너무나 선명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귀를 막고 싶었다. 견딜 자신이 없어서.
"떠나지 마. 데지레."
그러나 웨인단은 그 자리를 떴다.
웨인단이 본 세번째 장면.
비가 오는 날, 인릴 유리아나키드는 울고 있고, 데지레에게 떠나지 말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이것은 웨인단이 지켜보고 있는 이미 일어났던 과거의 일이며, 과거 데지레는 인릴을 떠난 적이 있다. 단순 이별이 아니라, 데지레 쪽에서 깊은 잠에 드는 등의 오랜 세월을 동반한 불가피한 이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4
이윽고 웨인단은 마주선 공기덩어리를 발견했다. 붉은 옷을 걸치고 자라지 않는 머리카락을 가진 웨인단은 붉은 돌이 박힌 검을 짚은 채 상대의 말을 들었다.
「세월만큼 나이든 악마, 그것이 나이다. 그대는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이든 줄 수 있다. 늙고 지친 악마에게도 그만한 힘은 있다. 나는 관대한 편이라 가끔은 별 조건 없이도 그대에게 선물을 하리라.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그대는 언젠가 나에게 지불을 할 때 상당히 힘겨우리라. 늙은 악마는 늙은 만큼 원하는 것이 많다. 그만큼 세상을 알고, 그만큼 갖고 싶은 것이 많고, 그만큼 세상이 내놓을 것이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젊은 악마들이 시시하게 생각하는 세상의 유희들, 그것들을 늙은 악마는 모두 좋아한다. 그는 오래 살았다. 그만큼 세속의 악마이다. 그는, 즉 나는 살아온 세월만큼 다양하고 지저분한 욕심이 생겨난 악마이다. 그대가 상상도 하기 어려운 갖가지 것들을 요구하리라. 환락을 자아내는 유희는 인간들이 더 많이, 다양하게 개발해냈다. 악마들은 즐길 거리가 늘어난 세상을 보며 자주 탄복한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렇게나 악마와 가까운 존재라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끼곤 한다. 인간들은 악마들의 부족한 창의력과 상상력을 요사이 들어 더욱 자주 채워주고 있지 않은가.」
웨인단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검 끝을 아래로 짚은 채였다.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네 영혼을 원한다. 무엇을 지불할까?」
공기덩어리가 엷게 떨더니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말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법. 그림자가 두렵지 않은가?」
웨인단이 본 네번째 장면.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보석이 박힌 검을 쥔 웨인단은 공기덩어리, 즉 늙은 악마와 마주했다. 웨인단은 늙은 악마의 영혼을 원했으며 그 대가가 무엇인지 물었다.
「너는 악마가 아니야. 그저 형체 없이 오래 살아온 영에 불과해. 이 방을 네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너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늙은 영이지. 악마는 별다른 것인가? 내가 그 말을 택했어. 내 것이야.」
「네 말대로 말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법. 너는 그 이름을 가지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공기덩어리는 웨인단의 검에 박힌 보석을 쏘아보는 듯했다. 눈이 없으니 그렇게 보였다는 것뿐이지만 그것은 옳았다.
「너는 네가 가진 것을 믿고 있다. 하지만 너는 지나쳤어. 네가 내줄 것이 적어 보이나? 네 거래는 이익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난 너에게 무엇이든 빼앗을 수 있다. 나는 보기보다 수백 배 강하다.」
「가져갈 대로 가져가 봐라. 단, 내 몫은 내놓은 후에 말이야.」
대화를 지켜보던 웨인단은 어린 왕이 준 붉은 보석의 차가운 각을 매만지고 있었다. 검을 짚고 섰던 옛 자신이 이윽고 검을 높이 쳐들었다. 반짝, 이윽고 끝났다.
웨인단이 본 네번째 장면 이어서.
늙은 악마는 웨인단에게서 대가로 무엇이든 가져갈 수 있다고 협박하지만, 웨인단은 개의치 않아한다. 그녀는 거래의 첫번째 수순으로 늙은 악마의 영혼을 가져간다.
「다시 보니 새롭군.」
웨인단은 풀이 죽은 듯 흐릿해진 공기덩어리를 바라보면서 방금 본 기억들을 수습했다. 자신의 기억 창고가 어떤 모양인지는 스스로도 잘 몰랐다. 오래 산 생명들은 수없이 망각을 경험하면서 기억 중 아주 일부만을 남겨 간직했다. 그렇게 남은 것들은 새로운 차례로 연결되고 분류되어 쌓였다. 재구성되지 않는 조각들은 흩어져 사라진 듯하지만 어느 순간 자력에 이끌리듯 새로운 기억줄기에 와 붙었다. 결국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 너는 이겼지만 이번에는 질 것이야. 무슨 새로운 거래를 가지고 왔지? 넌 빚을 갚아야 해. 넌 그때 생명을 담보로 걸었지.」
「그래. 덕택에 나는 더 걸 것을 가지고 있지 않지.」
웨인단의 대답에 공기덩어리는 감정이 솟구친 듯 진한 보랏빛을 띠면서 부풀어 올랐다.
「넌 날 속였어.」
웨인단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속임수야말로 네 특기가 아닌가.」
「이번에는 나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 너는 아직 내게 대가를 치르지 않았으니 네 뒤에는 네 거짓말의 그림자가 단단히 붙어 있다. 이것을 갚지 않은 채 또 다른 그림자를 지려 한다면 네 질긴 생명줄도 장담하지 못하리라. 약속의 날은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걱정할 것은 너 자신이야.」
공기덩어리가 보여준 것은 웨인단의 기억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기억들이다.
네번째 기억에서 보여준 늙은 악마와 웨인단의 거래는 웨인단의 승리로 끝났으며 늙은 악마는 그것이 사기라며 분개한다. 그도 그럴 것이, 늙은 악마는 자신의 영혼과 웨인단의 생명을 대가로 받아내려 했고 그것이 웨인단에게 치명적인 거래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생명을 앗아가는 건 웨인단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웨인단에게 죽음이란 깨어날 수 있는 긴 잠이었고, 늙은 악마는 이 점을 알지 못했다. 웨인단은 한 번 죽음(잠)으로서 거래를 완수했다고 주장하지만, 늙은 악마로선 자신의 눈앞에 웨인단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네가 빚을 갚지 않고 사라질까 요즈음 우려하고 있지.」
공기덩어리는 웃고 있는 사람의 어깨처럼 잠시 간헐적으로 들썩거렸다.
웨인단은 몸을 돌렸다. 바닥도 벽도 없는 방 한쪽에 비밀의 조각들이 자수정처럼 옅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돌아보며 준비된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는 내 칼을 찾았다.」
음산한 소음이 솟아났다. 방은 생명체처럼 노한 기운으로 가득 차 주위를 압박하며 으르대었다. 웨인단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눈을 떴다.
웨인단은 자신이 붉은 보석이 박힌 검을 찾았다고 말하고 늙은 악마는 잔뜩 분노한다.
희미한 빛 너머에 주하가 서 있었다.
언젠가의 누구15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주하는 물론 그처럼 팔을 벌리지는 않았다.16 그러나 가죽 샌들, 세르네즈의 전사가 신는 샌들만 보아도 웨인단은 그 어느 날 젖어 있던 샌들이 떠올랐다.
"힘들었군요."
웨인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서자 주하가 데지레, 하고 불렀다. 다시 열리기 시작한 감각의 문간에서 기억은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지만 필요한 행동, 해야 하는 행동은 어디선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언제까지나 나를 기다릴 건가요?"
"언제까지나."
주하는 인릴보다 키가 작았다. 생김새도 분위기도 전혀 달랐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문제도 안 됐다. 웨인단, 아니 데지레는 주하의 어깨에 매달린 푸른 돌 장식을 어루만졌다. 떠오른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웨인단(데지레)과 주하(인릴)의 만남.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몇 번이나 잠들고 깨어나도록 한 번도 깨어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는 언제까지나 이곳 지하 석실의 손님 중 하나였다.
"운도드 일리야. 고통 없이 잠든 분이지요."
웨인단이 금속 받침에 세운 빛 막대로 석판을 비추자 뒤따라오던 엘리종이 말했다. 그 이름에 대한 기억이 얼핏 떠오르려 하다가 깜빡거리며 사그라졌다. 웨인단은 석판 뒤에 놓인 유리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빛이 도는 긴 머리가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남빛 천에 분홍색 깃을 길게 잇댄 기도자의 복장을 보고서야 웨인단은 자신을 사랑했던 일리야를 알아보았다.
"좋은 사람이었지요."
"앞으로 3백 년은 지나야 깨어날 겁니다."
"그렇군요."
잠든 사람들은 지하 석실의 유리관 속에 눕게 된다.
웨인단과 엘리종은 지하 석실에 방문해 관을 하나씩 살펴본다.
웨인단이 다음 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일리야의 얼굴은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곳은 페라루하가 잠들었던 자리입니다."
석판 위에 '카니크 페라루하. 그는 흰 지팡이로 대하를 열었노라'라는 글귀가 보였다. 꽤 오랫동안 비어 있었는지 유리에는 생명의 기척이 없었다. 페라루하는 지금도 찾고자 하는 것을 위해 어느 숲속을 걷고 있으리라. 회색 망토를 걸치고 나뭇가지들을 헤치며 나아가는 그의 영상이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돌아온다면 그대17를 대신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리라.' 웨인단은 마음속의 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천 년 가까이 혼자 짊어졌던 짐이었다. 페라루하는 늘 떠나야 하는 웨인단을 보면서 언젠가 그 짐을 나눠 지길 원했다. 페라루하는 워하든 아니든 곧 뜻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제 웨인단은 더 이상 그 짐을 짊어질 수 없고, 페라루하는 곧 그 짐을 받아들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짐이었음을 곧 잊게 되겠지.'
잠들지 않은 자들의 유리관은 비어있다. 긴 여정을 떠난 카니크 페라루하의 관 역시 비어있다.
지금까지 카니크 페라루하는 웨인단의 짐을 짊어질 만한 영의 단계를 갖추지 못했으나, 곧 그 단계에 도달해 웨인단이 잠들고 그가 대신 웨인단의 짐을 짊어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는 태양의 탑 5권에서 륀 유이치의 대사로도 언급된다.18 그리고 실제로 물려받은 듯 보인다.19
이윽고 웨인단과 엘리종은 가장 깊숙한 장소에 놓인 석관 앞에 섰다. 빙 둘러 세워진 받침 위에서 빛 막대 스무 개가 흔들리지 않는 빛을 냈다. 그 위로 두 사람이 든 빛 막대의 빛이 끊임없이 흔들리며 겹쳐진 그림자를 드리웠다. 다른 관과 달리 그 관에는 돌 뚜껑이 덮여 있었다.
"레 클로슈20, 아직 열어볼 수는 없겠지요?"
"얼마가 지나야 할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엘리종이 관 앞에 드리워진 베일을 걷었다. 아무 장식도 없는 흰 치마와 긴 소매가 빛 막대들이 비추는 붉고 노란 빛을 받아 화려해졌다. 금빛 머리는 제단에 올리는 화환처럼 빛났다.
이 석관 앞에는 이름이 새겨진 석판이 없었다. 그러나 누가 여기에 잠들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분이 깨어나고 나면 이런 짐을 질 필요가 없을까요?"
"알지 못합니다. 잠든 그분께서 지금의 변화를 아실까요? 또는 아셨을까요?"
두 번의 질문을 잇달아 던졌지만 엘리종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석관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모퉁이를 매만졌다. 머리가 흘러내려 얼굴을 가렸다. 웨인단도 머리장식을 모두 풀고 왔다. 붉은 머리채가 빛을 받아 맥동하는 듯했다.
엘리종의 눈은 회색이 살짝 감도는 눈동자를 제하고는 거의 완전히 희었다. 눈뿐 아니라 다른 모든 곳도, 입고 걸치는 것도 희었다. 금빛 머리만이 살아 있는 듯 보이는, 환영 같기도 하고 유령 같기도 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는 웨인단의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다른 관과 다르게 석관이라 안을 볼 수 없는 관은 지하 석실의 아주 깊숙한 곳에 위치해있다. 석관의 주인은 아주 오래 잠들어있으며, 그럼에도 완전히 죽지 않고 여전히 잠들어있다.
빛 막대 하나가 흔들리더니 간헐적인 광채에 싸여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빛 막대는 빛을 낼수록 작아지다가, 마지막에는 흘러내린 물마저도 깨끗이 날아가 버리는 물건이었다. 웨인단의 머릿속 기억 조각 하나에 불이 당겨졌다. 빛 막대를 만들었던 사람의 기억이었다. 그 사람도 이렇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고 빛 막대는 그의 생명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확신할 수 없는 기억이 반짝 타오르고 스러졌다. 이 기억을 다시 떠올릴 날이 올까?
엘리종이 빛을 잃은 빛 막대를 수습했을 즈음 남은 것은 약간의 물자국과 받침대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생명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내일 아침에 빛 막대를 좀 더 가져와야겠군요."
두 사람이 말을 높이는 것은 서로가 처음 생명의 한계를 넘은 후부터였다. 데지레가 웨인단이 되고, 드헬라가 엘리종이 되었던 날부터. 그들은 너무 많은 기억을 품고 있어서 이미 옛날처럼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스스로조차 자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가늠하지 못했기에 다른 누구를 아노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다섯 번째 날이 저무는군요. 이제 밤을 새우고 여섯 번째 날을 맞으면 그대를 볼 순간도 잠시뿐이겠죠? 웨인단, 그대의 잠든 얼굴을 그토록 오래 보았는데......."
엘리종의 감정이 약간 흐트러졌다. 웨인단이 대답했다.
"오래, 라는 말은 언제나 필요가 없지요."
다섯 번째 날 저녁이며, 일곱 번째 날이 되면 웨인단이 다시 잠들어야 함을 암시한다.
언제나 그랬다. 웨인단은 떠나는 사람이고 엘리종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떠날 때면 웨인단은 늘 이 말을 하곤 했다. 떠나 있는 동안을 완전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어찌 보면 순식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키는 사람에게 수백 년이 어찌 짧으랴. 그러나 웨인단은 애써 이 말을 되풀이했다. 웨인단은 이미 잘 알지도 못하는, 아주 가끔 만나고 훨씬 더 오래 헤어져 지내는 흰 치마의 엘리종을 사랑했다. 그녀들은 너무 오래된 친구여서 아주 조금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기를."
엘리종의 단정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일어섰다. 엘리종도 붉은 머리와 붉은 돌이 박힌 검을 가진 웨인단을 사랑했다.
탕, 문이 닫히고 웨인단은 수십 개의 빛 막대와 함께 홀로 남았다.
"그러나 그분은 처음으로 생명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 이렇듯 오래 누워만 있다니 어찌 보면 믿어지지 않는 사람. 내 첫 번째 변화의 꿈에 나타났던 인도자21이자 그래서 더욱 더 대답을 얻고 싶은 사람. 왜 그분은 단 한 명, 내 꿈에만 나타나 신성한 짐승22과 만나던 순간으로 나를 데려갔던가. 그분은 잠을 자면서도 또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웨인단은 석관 모서리에 기대앉아 홀로 읊조리다가 불쑥 물었다.
"듣고 계신가요, 예니체트리?"
붉은 머리가 석관 위에 흩어져 있었다. 웨인단은 천장의 색 바랜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바람 소리가 지나갔다. 그림 속의 여전사는 작은 달의 소녀 파비안느였다.
"그대들 둘은 같은 사람이죠?"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을 질문이었다. 작은 달의 수호자인 여전사 파비안느와 예지의 고양이를 데리고 다녔던 예언자 예니체트리. 살았던 연대도 다르고 삶의 모습은 더더욱 달랐던 둘이건만 웨인단은 오래 전부터 확신해왔다. 생명의 경계를 넘어서는 자들에게 처음으로 주어지는 예지몽을 꾼 후로,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스스로는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엘리종이 간 후, 지하 석실에 홀로 남은 웨인단은 기억 창고에서 보았던 첫번째 기억으로 왜 파비안느가 나왔는지 의문을 가진다.
웨인단은 파비안느와 예니체트리가 동일인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오늘, 무덤일지도 모를 지하 석실에 누운 웨인단은 계속 그 생각에 매달렸다. 웨인단이 태어나기도 전에 잠들었던 예언자23는 왜 아직도 깨어나지 않을까? 그분은 무엇을 기다리기에 고통스럽게 잠들고 깨어나기를 되풀이하는 그녀의 자식들24을 내버려두는 것일까. 작은 달의 여전사25는 무엇을 기다리기에 끝없는 잠에 빠져 있는가.
바람 소리 사이로 미묘한 음이 울리는 듯했다. 아주 작아서 속삭임 같았다.
"달은 차고 별들은 어둡구나."
웨인단은 하늘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26 수백 년간 닫혀 있다가 고작 엿새째 열려 있는 자신의 관이 저만치에 놓여 있었다. 웨인단은 고통스러운 잠과 부활을 되풀이하면서 뒤섞여버린 자시느이 기억을 믿지 못했다. 본능인지 이성인지 모를, 자침을 따라가는 작은 바늘처럼 움직일 뿐이다. 사랑했던 것들을 버리고,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꿈을 꾸면서, 누구의 의식인지도 모를 것에 매달려, 정해진 길로 발을 옮겨 왔다.
"묻지 말라고요? 그러면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내 잃어버린 기억들은 누가 가지고 있나요? 지금 내가 가진 기억은 누가 보장해 주나요?"
지하 석실에는 텅 빈 관들과 누군가가 쉬고 있는 관들이 까마득히 긴 줄을 이루었다. 그중 오래된 것들은 안쪽에 놓인 몇 개에 불과했고 나머지들은 자주 주인이 바뀌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의 생명조차 넘지 못했고, 그것을 넘은 자들도 두 번째 생명을 넘지 못했다.27 관들은 오래되었으나 주인은 새로운 자일 때가 많았으므로 문에 가까운 석판에는 새 이름을 적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중 가장 안쪽에 놓인 관이 예니체트리의 관이었다. 이 관이 놓이던 광경을 보았던 사람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웨인단도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은 아니리라. 때가 되었을 때 이토록 오래된 육체는 어디로 보내어질까? 웨인단이 다시 잠들고 이제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 육체도 썩을까? 그때쯤 자신의 영혼은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가끔 관을 점검하는 사람이 와서 뚜껑을 열고 주인이 살아 있는지, 육신에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는데 이레 정도는 부패하더라도 그대로 놓아두고 상태를 주시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부패가 진행된다면 밖으로 내보내지고 그 관은 새로운 주인을 받기 위한 준비를 했다. 내부를 깨끗이 닦은 후 지하에서 꺼내 볕 아래 오랫동안 놓아두었다. 그리고 석판에 새겨진 글자는 지워지고 이름은 낡은 명부에만 남게 된다.
웨인단이 기대고 있던, 지하 석실 가장 깊은 곳의 석관 주인은 예니체트리다.
웨인단의 남동생도 그렇게 관을 떠나갔다. 영의 단계가 낮은 때 겪은 일 중 몇 안 되는 또렷한 기억이었다. 그날의 기분은 체험이 아니라 글로 읽은 것처럼 건조해져 있었지만 그날 그 광경을 본 뒤 웨인단은 나르본을 자신의 동생으로 삼았다. 눈물과 분노와 아쉬움, 그런 것들은 이제 활자처럼 굳어져버렸다. 그리고 나르본은 오래 살아남았다.
웨인단은 일어섰다. 자신을 둘러싼, 아니 예니체트리의 석관을 둘러싼 스무 개의 빛 막대가 붉은 옷 위로 일렁거렸다. 관을 점검하는 사람들조차 감히 열어보지 않는 이 관의 주인은 아직도 자고 있을까? 혹은 이미 부패했는데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이 안에 그녀가 정말로 누워 있기는 할까?
바깥과 통하는 문은 닫혔을 텐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웨인단의 옷깃을 건드리고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빛 막대를 흔들었다. 이어 소리가 들려왔다. 건반을 부드럽게 두드리는 듯한 음이 차례로, 선율을 이루지 못한 채 울렸다. 웨인단은 귀를 기울였다. 이곳에서 소리를 들을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위해 울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웨인단은 예니체트리가 정말 석관 안에 누워있는지 의심한다.
이윽고 웨인단의 눈이 감정의 무게에 짓눌려 가늘어졌다. 고통스런 질문은 답을 얻으면 더욱 고토스럽다. 바람이 연주하는 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그녀가 사랑했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으나 떠나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이 그녀를 닮은 눈을 하고 지나갔다. 아니, 그들이 떠나기 전에 웨인단이 항상 먼저 떠났다. 사랑을 하기에 백 년은 너무 짧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에게는 이레도 충분히 길었다. 이 순간에야, 너무 늦은 지금에야 깨달았다.
"나를 기다렸군요. 이렇게 항상 떠나기만 하는 나를."
멈추지 않는 빗속에서 웨인단을 기다리던 사람28은 없지만, 그 사람은29 다시 곁에 있었다.
"그래. 떠나기 전에 갚아야 할 빚이 있어.30"
빛 막대 하나가 녹아갔다. 웨인단은 자기 대신 눈물을 흘리는 막대를 바라보았다. 빛 하나가 사라지자 온 방향으로 드리워져 거의 지워진 듯했던 그녀의 그림자 하나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웨인단이 짊어진 그림자는 보이지 않아도, 생명이 다해도, 맹세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워지지 않았다. 웨인단은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희미한 환영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렇군요.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겠군요. 예언의 어머니시여."
웨인단은 매번 먼저 잠들어 수백 년동안 오지 않는 자신을 환생하면서도 계속 기다리는 인릴이자 주하를 떠올린다.
그리고 늙은 악마와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데.......(다음 페이지)
웨인단은 잠들어 있었다. 침대 앞에 푸른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르본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나르본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하 석실에서 나온 웨인단이 한 말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내다보였다. 여간해서는 바깥일에 잘 나서지 않는 엘리종이 성 아래 뜰에 서서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성에서 가장 솜씨 좋은 세공 장인이 이미 명령을 받고 작업실로 불려갔다. 꽃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처녀들이 성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정작 또 한 명의 주인공은 그들 속에 보이지 않았다.
나르본은 휘장 너머 웨인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깨어나길 기다리며 수없이 석실을 드나들던 때 보았던 관속의 웨인단처럼 붉은 머리채에 감싸여 조용히 쉬고 있었다. 오늘의 그녀는 평온한 듯도 했고 슬픈 듯도 했다. 그리고 하루 사이 창백해졌다.
안타까움과 기다림이 영의 육성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나르본은 잘 알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을 벗지 못했던 그는 이제 자신의 소원을 접을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나르본은 이제 안다. 왜 장로들이 웨인단을 일찍 깨웠는지를. 아니, 웨인단이 스스로의 의지로 깨어났음을. 웨인단은 찾아야 할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찾았다.
생명이 끝나도 맹세는 영원하니, 웨인단은 주하와 혼인 맹세를 하기로 결심한다. 지하 석실에서 나온 웨인단은 결혼 준비를 하겠다고 말했고, 그로 인해 성은 분주해진다.
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머리를 내밀었다.
"깨우시래요."
"알았다."
나르본은 몸을 일으켰다. 창밖에서 불어온 봄바람에 소매 없는 푸른 겉옷이 펄럭거렸다. 나르본은 휘장을 젖히고 조심스럽게 웨인단의 머리맡으로 갔다. 그런 나르본을 조금 전의 소녀가 떠나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웨인단. 웨인단. 이제 그만 일어나요."
나르본은 웨인단의 다른 이름인 '데지레'를 좋아했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웨인단이었고 나르본은 데지레라는 이름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웨인단이 하룻밤 새 깊어진 눈을 떴다. 눈앞에 선 나르본이 보였다.
나르본은 웨인단의 눈에서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도 이제 다음 단계로 가게 되리라. 늘 그랬듯 이번에도 나르본을 다음 단계로 데려간 것은 웨인단의 결정이었다.
나르본은 자신도 곧 다음 영의 단계로 가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웨인단은 앞에 선 그를 보았다. 쥐고 있던 푸른 돌이 박힌 반지를 매만졌다. 오전 동안 급히 만든 것이지만 만든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정성을 쏟았음을 알았다. 벽걸이 융단이 두 사람의 머리 뒤쪽에 걸려 있었다. 그 위로는 흰 휘장이 벽마다 쳐져 있었다. 이렇듯 모습이 바뀌었지만 이곳은 기도의 방이었다. 웨인단이 이 방을 택했다.
리라 타는 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햇빛은 태어나 처음 보았던 날처럼 황홀하게 빛났다.
웨인단은 자신의 붉은 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 위로 희고 긴 반투명한 가운을 걸쳤고 머리에는 화관을 썼다. 웨인단은 상대의 손을 잡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 손가락에 푸른 반지를 끼웠다.
세르네즈 전사의 푸른 옷을 입고 그 위에 흰 가운을 걸친 주하가 붉은 돌이 박힌 반지를 쥐고 웨인단의 손을 잡았다. 주하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지만 눈 속에는 슬픔이 있었다. 웨인단은 그런 주하를 물끄러미 보았다. 잠시 후 주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주하가 잡은 웨인단의 손은 차갑고, 단단했고, 매끄러웠다. 웨인단을 위한 두 번째 붉은 돌이 제 자리를 찾아 끼워졌다. 웨인단은 그 손으로 주하의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주었다. 언젠가 그토록 닦아 주고 싶었던 그 사람의 젖은 눈을 지금에야 닦아주었다.
주하의 얼굴은 작고 희며 뺨은 앳되었다. 회색 눈만이 오래된 생명처럼 넓고 깊었다. 주하가 웨인단의 손을 잡았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대리석 벽과 하늘과 융단과 사람들이 사라지고 세상이 서로의 얼굴로 가득해졌다. 입술이 닿았다. 세상의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 다시 시간 속으로 묻혔다.
여섯 번째 날, 웨인단과 주하는 기도의 방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혼인의 서약은 영원하리니. 그대들은 시간의 축복을 받을 것이오."
의식 집전을 위해 은빛 깃을 댄 옷으로 갈아입은 히와칸 옹스트가 손을 들어 올리며 선언했다. 멈췄던 음악이 다시 흐르고 엘리종이 눈 속에서도 자라는 금빛 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들고 나섰다. 그리고 나르본이 겨울에도 변치 않는 정원에서 꺾어온 푸른 잎사귀 다발을 쥐고 걸어 나왔다. 엘리종의 꽃을 받은 주하는 고개를 숙였다. 엘리종은 주하와 비교할 수 없는 나이와 서열을 갖고 있었지만 오늘 그에게 꽃을 주는 역할을 자청하였다.
나르본의 푸른 잎사귀 다발을 받은 웨인단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르본은 웨인단의 눈길을 알아채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웨인단은 나르본의 영이 곧 다음 단계로 가리라는 것을 금세 알아보았다.
"너를 축복한다, 내 동생 나르본. 오늘은 나를 위한 날이나 곧 너를 위한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나르본이 고개를 숙였다. 웨인단을 떠나보내는 날이었다, 오늘은. 흰 가운과 화관을 쓴 웨인단은 비할 데 없이 다름다웠고, 그리고 파비안느를 닮았다. 웨인단을 위해 새로 만든, 붉은 돌이 박힌 검이 곁에 놓여 있었다.
"새로 혼인한 이들을 위한 술을 가져오라."
옹스트의 말에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탁자와 의자, 잔치 음식들, 붉은 포도주와 아름다운 잔들이 날라져왔다. 며칠간 춥던 날씨가 오늘만은 풀렸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때이나 오늘 그들은 웃으며 먹고 마실 것이다. 내일의 짐을 질 사람31이 베푼 잔치였기에. 웨인단이 주하의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사람들이 그들을 축복하는 잔을 높이 올렸다. 끝은 곧 시작이었다.
"데지레, 데지레, 그만 일어나요."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바로 곁에 있을 텐데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왜인지 알기에 목이 메었다.
"나의 데지레."
휘장이 흔들렸다. 데지레가 팔을 올렸다. 주하가 몸을 굽혔다. 데지레는 약간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영원히 떠날지도 모르기에. 주하를 두고서. 그를 두고서. 그럴 수 있을까?
데지레는 몸을 일으켰다. 주하의 머리를 껴안았다. 이제 데지레는 전부를 잃고 전부를 가질 것이다. 이제 자신을 찾으러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데지레는 주하를 걱정했다. 자신은 견뎌내겠지만 그는 어떨까. 그러나 데지레는 잃어버린 기억 조각을 되찾았으므로 주하가 어떻게 될지도 어렴풋이 짐작했다.32
주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데지레, 나는 기다려요."
주하가 데지레를 마주 껴안았다. 누구든 기억만 갖고 살 수는 없다. 그렇기에 주하는 더욱더 데지레를 또렷이 기억하려 애썼다.
아침이 밝았다. 일곱 번째 날이었다.
일곱 번째 날이 오고 데지레에게 잠들어야할 때가 찾아온다. 이전에 들던 긴 잠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다음 페이지서부터 알 수 있다.
「많이 기다렸겠지?」
「그렇다. 많이 기다렸다.」
웨인단은 어제부터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생장하고 있었다.
「저번에 널 속였음을 인정한다. 그때 나는 내 생명을 걸었지만 이렇듯 지금 여기에 살아 있으므로 그것은 분명 속임수였다.」
공기덩어리는 웨인단의 말을 듣고 뭉클뭉클 부풀어 오르던 몸체를 단숨에 커다랗게 부풀렸다. 이어 흥분한 듯 약간 떨었다.
「그래, 넌 나를 속였다. 오늘은 속이지 못한다.」
「속일 생각은 없다.」
웨인단은 그때처럼33 붉은 돌이 박힌 검을 짚고 공기덩어리 앞에 섰다. 이스나에의 방은 본래 영들을 위한 의식을 행하는 신성한 방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을 '악마'라고 부르는 오래된 영을 가둔 감옥이 되었다. 그리고 지도에서 지워졌다. 웨인단의 봉인은 그녀의 거짓 맹세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거짓이었음을 인정하면 풀릴 것이었다. 공기덩어리의 색깔이 불그레해졌다. 마치 웨인단의 머리카락 같았다. 밖을 내다볼 수는 없었지만 이날의 하늘도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즉, 웨인단은 지난 번 늙은 악마와 거래에서 속임수를 사용하여 이스나에의 방에 봉인했고, 그 후 긴 잠에 든 것이다. 이후로 이스나에의 방은 지도에서 사라져 늙은 악마를 가둔 감옥이 되었다.
그러므로 웨인단이 속임수를 사용하였다는 걸 인정하면 거래를 무효가 되고 늙은 악마를 가두는 봉인이 풀리는 것이다.
「네가 속임수를 인정했으니 나도 네 그림자를 풀어줄 것이다.」
「듣던 중 고마운 말이군.」
웨인단이 응수했다. 공기덩어리는 기쁜 나머지 웨인단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고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네가 거짓 맹세를 인정하지 않았더라도 그간 힘을 기른 나는 이 감옥을 곧 부쉈을 테지만 그건 나로서도 달가운 일은 아니다. 네가 거짓 맹세를 인정하지 않는 한, 내 행동 역시 맹세를 어기게 되기 때문이지. 이제 네가 속임수를 인정하니 난 속임수 게약에서 자유로워졌다. 몹시 기분이 좋으니 다른 영을 모두 삼키더라도 너는 내버려두도록 하지.」
「그렇게 오래 갇혀 지냈는데 의외로 관대해졌군.」
공기덩어리는 웨인단의 말이 거슬렸는지 부풀기를 멈췄다.
「뭐지? 나를 기분 나쁘게 해서 네가 얻을 것이 있나? 넌 이제 내게 구속력이 없다. 너 역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야.」
「즐거운 기분을 깨는 것은 안됐지만 이만 현실을 직시해야겠군. 늙은 악마여.」
늙은 악마는 신이 나서 선심까지 쓴다.
웨인단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공기덩어리의 목소리보다는 작았지만 한 음절 한 음절이 천장이 사라진 방을 울렸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눈가에는 물기가 맺혔다.
웨인단은 검을 높이 들었다. 공기덩어리가 쉿쉿거리며 보랏빛으로 변했다.
뭐야? 뭘 하려는 거지?
오래된 약속을 지키겠다. 거짓 맹세를 했으니 바로 돌려야겠지.
붉은 돌에서 핏줄기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공기덩어리가 허둥지둥 높이 떠올랐다.
그걸로 나를 해칠 수는 없을 텐데?
못 들었나? 나는 지난번 맹세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웨인단의 붉은 옷이 불붙은 것처럼 빛나며 휘날렸다. 검에서 나오는 빛이 온 몸을 감싸고 방 전체로 번져갔다. 공기덩어리는 더 높이 도망치려 했으나 천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뭔가에 가로막혔다. 공기덩어리는 웨인단을 쏘아보며 증오의 감정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녀의 얼굴이 희미한 미소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내 영을 이제 가져가라.
웨인단의 검은 그녀의 의지를 떠났다. 공기덩어리는 웨인단의 영을 흡수했지만 자신의 영을 유지하진 못했다. 맹세의 말은 불꽃으로 변해 방의 비밀들을 태웠다.
나의 검은 나 자신, 나의 옷은 나의 의무였다. 네 자리를 표시한 패를 들고 너를 만나러 온 나는 지워진 역사를 되돌렸다. 죽은 사람을 만나 천분을 깨닫고 산 사람을 만나 기억을 되찾았다. 이제 내 모든 것이 어디로 갈지는 모르나 되돌아가면서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리라.
이른바 동귀어진. 웨인단은 지난 번 속임수를 썼던 거래를 올바르게 수행하겠다며 자신의 영을 늙은 악마에게 주었다. 늙은 악마는 웨인단의 영만으로 벅찼는지, 아니면 동시에 웨인단에게 영을 빼앗긴 것인지, 어느 쪽이든 자기 자신의 영을 유지하지 못했고 불꽃과 함께 방에서 타올라 사라졌다. 웨인단도 마찬가지.
"그 약을 가져오세요."
엘리종은 소녀가 가져온 목이 긴 병의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것을 바닥에 부었다. 향기가 퍼졌다. 바닥에는 물이 마른 자국 같은 것이 있었고, 붉은 돌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왕께서."
엘리종이 붉은 돌을 주워 소년 왕 루이즌에게 건넸다. 검은 소매 속에서 손이 나와 그것을 받아들더니 도로 들어갔다.
웨인단은 기묘한 기분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남은 자국은 빛 막대의 마지막과 비슷했다. 이제 웨인단이 쓰던 관은 누가 쓰게 될까?
이 자리에 주하는 없었다. 나르본은 와 있었다. 나르본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웨인단은 나르본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어깨를 건드릴 몸이 없었다.
약병에서 나온 물의 향내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말로만 듣던 영혼의 증오를 달래는 술인 모양이었다.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스나에의 방은 참 아름다운 기둥들을 가진 방이었다.
"웨인단이 여기 와 있군요."
엘리종이 말했다. 두터운 휘장 너머에서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엘리종의 말에 사람들이 무시코 주위를 둘러보다가 실소했다.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엘리종은 한참이나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윽고 웨인단이 선 쪽을 주시했다. 웨인단도 엘리종을 바라보았다.
영혼의 증오를 달래는 술,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웨인단,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는 육체가 없는 웨인단, '이스나에의 무녀'라는 이명을 가진 엘리종만이 볼 수 있는 웨인단.
"웨인단. 돌아올 거죠?"
모르겠다, 라고 웨인단은 대답한다. 엘리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제 내가 알 단계가 아니로군요."
웨인단은 엘리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엘리종도 마주 손을 내밀었다.
"자, 왕이시여. 그분에게 뭔가 말하십시오."
소년 왕이 웨인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왕은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생명인데도 그녀와 같은 생명을 이해했다.
"그대를 위해 벽걸이 융단을 만들기로 했어요."
왕이 입을 열었다. 눈에 약간의 물기가 반짝거렸다.
"그대가 돌아오면 기도의 방에서 아주 오래된 융단을 하나 더 보게 되겠죠."
왕의 눈에 맺혔던 물기가 흘렀지만 그는 아이처럼 웃었다.
"그대의 보석은 내가 다시 간직해요. 그대가 돌아오는 날에도 어느 왕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왕이 나르본을 바라보았다.
"자, 그대도 뭔가 말하세요."
"웨인단......."
나르본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이나 감정을 삼키는 그를 바라보면서 웨인단은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물론 닿지 않았지만.
"주하는 괜찮을 겁니다."
웨인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눈에도 뭔가가 맺히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느낌일 것이다. 이미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오래, 오래 살아서......반드시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다시......."
결국 나르본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웨인단은 약병을 가져온 소녀가 나르본을 바라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다른 곳으로 갈 때가 되었다. 웨인단은 엘리종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엘리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당신의 관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겠죠?"
그랬다. 이제 웨인단은 자신의 관이 어느 것인지 깨달았다. 이제부터 아주 긴 잠을 잘 것이다. 깨어날지 깨어나지 못할지 모를 잠을. 그리고 깨어난다 하더라도 이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새 생명으로 깨어나게 될 것이다.그러나 기억은 사라졌어도 자신의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웨인단이 이르러야 했던 다음 단계였다.
웨인단은 이제 이전과 다르다. 긴 잠에 들면 자신의 의지로 깨어나지 못하며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깨어난다고 하더라고 이전 기억을 일부나마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며 새로이 환생하게 되는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견딜 수 있겠는가?"
"예."
"그래. 그대를 힘껏 돕겠네."
옹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옹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오래 걸릴 것이야. 자네는 많은 것을 잊게 되겠지. 웨인단이 돌아오더라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네. 웨인단도 인릴을 그대의 눈동자, 그리고 목소리로만 기억했지. 그렇더라도 웨인단이 어제의 의식을 통해 자네의 신부가 되었음을 잊지 말길 바라네."
"아닙니다. 웨인단은 그 전부터 저의 신부였습니다."
옹스트는 주하를 주시하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대가 이미 그것을 알았단 말인가? 웨인단이 가르쳐줬는가?"
"아닙니다.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옹스트는 주하의 눈이 앳된 얼굴과는 달리 세월의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지난 생애를 그렇게 빨리 기억해 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자네가 첫 단계를 반드시 넘도록 하겠네. 그대는 반드시 신부를 만나야 하리. 세월이 얼마가 되더라도 그분을 기다려야 하리."
세르네즈의 전사 류지 로 주하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샌들의 가죽 끈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웨인단이 기약 없는 잠에 빠진 후, 옹스트와 주하는 대화를 나눈다.
주하는 이미 전생의 자신과 웨인단의 관계를 기억해낸 상태이다.
웨인단을 기다리기 위해선 주하도 영의 단계를 높여 생명의 첫 단계를 넘어야했기에, 옹스트가 이를 돕기로 결심한다.
"데지레, 들려요?"
"달은 차갑고 별은 어둡군요."
관에 기대앉은 주하는 스무 개의 빛 막대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당신은 오랫동안 잠을 자겠죠? 그래도 매번 다시 태어났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다시 만날 거라고 믿어요."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면 좀 아플 것 같군요."
주하는 몸을 뒤척이며 관의 모서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이 나를 만나려고 일찍 깨어난 것을 압니다. 누가 가르쳐 줬을까요? 아무도 안 가르쳐 줬겠지요? 그러니까 나도 스스로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빛 막대 하나가 스러지기 시작했다.
"저것은 자기 몸이 다하도록 눈물을 흘리는군요."
"내가 당신을 잊더라도......꼭 나를 기억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것들은 전부 당신 안에 있었어요."
지하 석실의 가장 깊은 곳에 놓인 관, 이제 이 관이 비어 있다는 것을 주하도 안다. 왜 이 관에는 이름이 없는지도, 이 관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안다.
"음악 소리가 들리네요."
바람 소리가 어디선가 불어온다.
웨인단이 스스로 수십 년이나 일찍 잠에서 깨어난 것은 이때 환생한 주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하 석실의 가장 깊은 곳에 놓인 관, 그곳은 예니체트리의 관이자 파비안느의 관이다.
또한 웨인단의 새로운 관이기도 하다. 즉, 웨인단 = 파비안느 = 예니체트리인 것. 두 페이지 전 엘리종의 '당신의 관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겠죠?'라는 질문34, 웨인단의 기억 창고에 나온 기억은 모두 웨인단과 관련이 있으나 첫번째 기억만 뜬금없이 파비안느가 나왔던 것.
- 1. '잠'이 평범한 잠이 아니며, 돌이 닳을 동안의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암시한다. ↩
- 2. 고대 이스나미르의 점성술사 혈통에게 이어지는 이름이다. 자세한 내용은 점성술 아룬드 문서 참조 ↩
- 3. 제사의 아룬드가 14번 돌아오는 주기는 80년가량 되며 인간의 평균 수명이다. ↩
- 4. 웨인단의 본명 ↩
- 5. 웨인단의 연인 ↩
- 6. 환생한 것이다. ↩
- 7. 인릴의 이명이 '흰 발의 거인'이기도 하다. ↩
- 8. 웨인단. ↩
- 9. 류지 로 주하. ↩
- 10. 고대 이스나미르 때부터 존재하는 혈통이며 현재 이스나미르 왕가까지 이어졌다. ↩
- 11. '루아'는 고대 이스나미르어로 왕을 뜻한다. 즉 왕의 이름은 루이즌이다. ↩
- 12. 웨인단이 잠들기 전에는 존재했으나 그 후에 사라진 이스나에의 방 ↩
- 13. 인릴 유리아나키드 ↩
- 14. 언제부터 내렸는지 모를 비가 '멈추지 않는 비'를 의미한다면 데지레는 인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걸고 비를 멈추고 긴 잠에 빠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
- 15. 인릴 유리아나키드 ↩
- 16. 주하가 완벽히 인릴과 같지 않음을 의미한다. ↩
- 17. 웨인단 ↩
- 18. "오래됐다고? 그래. 자네는 이제 세월을 느낄 줄 알게 됐군. 예전에 웨인단이 그랬듯이. 웨인단이 잠들기 전에 자네가 곧 자신의 단계에 이르리라 했다지만 실감한 적은 없었는데, 오늘에야 실감하는군." ↩
- 19. "(전략)...웨인단은 우리를 떠나기 전에 내게 약속을 남겼어. 나는 그 약속을 언제 어떤 식으로 지키게 될지 몰랐지만 이제는 아네. 다행히 그날이 빨리 찾아와서 나는 그게 본래 웨인단의 짐이었고 내가 물려받았음을 아직 잊지 않았네...(후략)" ↩
- 20. 엘리종의 별명 ↩
- 21. 파비안느 ↩
- 22. 라이스헬로프 ↩
- 23. 예니체트리 ↩
- 24. 고대 이스나미르 인들 ↩
- 25. 파비안느 ↩
- 26. 여긴 지하 석실이다. ↩
- 27. 영의 단계를 육성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의미한다. 실패하면 그대로 죽는 것이다. ↩
- 28. 인릴 유리아나키드 ↩
- 29. 류지 로 주하 ↩
- 30. 늙은 악마와의 거래 ↩
- 31. 웨인단 ↩
- 32.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데지레가 찾은 기억 조각 중 데지레를 계속 기다리는 인릴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혹은 기억 조각을 되찾으며 예지력도 되찾은 것인지. ↩
- 33. 네 번째 기억처럼 ↩
- 34. 엘리종이 이제 와 새삼스레 관의 위치를 재확인시켜줄 이유가 없었다. 웨인단은 지금껏 4번이나 깨어났고 그동안 같은 자리의 관에서 잠을 잤다. 관의 위치가 변한 게 아닌 이상 나올 수 없는 질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