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소녀는 밤낮으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선 긴 머리를 틀어 올린 늙은 나무가 다정스레 소녀를 맞았고, 철갑옷을 입은 기사가 싸늘한 바닷가를 달렸으며, 숲에서 헤아릴 수 없는 손들이 이야기를 품고 손짓했다. 눈을 뜨고 있는 동안 소녀를 둘러싼 열 벌의 화려한 드레스와 백 개의 비싼 보석, 천 개의 달콤한 간식으로도 소녀의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날이 왔다.
2.2. 태양의 탑 구판 2권
세 개의 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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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아름다운 여자 마법사가 흰 돌로 세워진 탑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황량한 바닷가로서 몇 년에 한 번 나그네가 찾아들까 말까 한 무인지경이었다. 그녀는 아주 나이가 많았으나 젊음의 비법을 손에 쥔 탓인지 언제고 늙지 않는 처녀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언제 태어났으며, 그 탑이 언제 세워졌고, 그녀가 언제부터 그곳에 살고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바다의 딸이라 불렀고, 언제고 바다와 정답게 이야기했다. 어느 날, 그 바닷가에 지치고 굶주린 한 사람의 나그네가 나타났다. 여자 마법사는 악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리 착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그네를 불러들여 필요한 만큼의 대접만을 해주었다. 그러나 생사의 고비를 헤매던 나그네는 크게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제 힘이 닿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당신의 소원을 한 가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마법사는 조소를 띠며 자신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고, 있다고 한들 한낱 나그네인 당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나그네는 이 왕국의 젊은 왕으로서 믿음에 따른 고행을 하기 위해 먼 곳까지 여행해 온 것이었다. 나그네가 고집을 굽히지 않자 마법사는 약간 떠보려는 심산으로, 자신이 늘 혼자라서 외로우니 3년간 성에 머무르며 허드렛일을 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뜻밖으로 나그네, 아니 왕은 그 소원을 받아들였다. 3년 동안 젊은 왕은 몇 번인가 이 고행에 대해 회의를 품긴 했으나, 비교적 열심히 일했다. 여자 마법사는 점차 그의 성실함에 반하게 되어 약속한 3년이 끝나는 날 그를 남편으로 맞고 싶다고 말했다. 둘은 결혼하였고, 행복하게 몇 달이 흘러갔다. 이듬해 봄이 오자 왕은 이 외로운 바닷가에 싫증을 내고 사람들이 많은 왕성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녀는 우울한 눈으로 왕을 보내주면서 정확히 10개월 뒤에 돌아와 준다면 자신이 그의 아내로서 왕과 함께 성으로 가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왕은 성으로 돌아가는 순간, 외로운 바닷가에 대한 일은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 거기엔 과거 결혼을 약속했던 귀여운 약혼녀가 있었고, 그는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새로 결혼을 하였다. 그는 수백 살이 넘는 여자 마법사가 왕국의 왕비가 되는 것은 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하고 3년이 되었으나 왕비에게는 태기가 없었다. 누군가가 '정확히 3년째가 되었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왕의 머리 속엔 여자 마법사와 3년간 약속하여 일했던 일이 갑자기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그녀의 소식이 궁금하다고 느꼈다. 왕은 강한 기사를 여럿 거느리고 바닷가의 탑을 찾아갔다. 그러나 탑은 오랫동안 버려진 듯 폐허가 되어 있었고 사람의 그림자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탐색에 지친 일행은 밤이 늦어지자 바닷가에서 야영을 했다. 그날 밤 왕의 꿈속에, 여자 마법사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갑자기 늙어버린 듯, 옛날의 아름다움을 잃은 초췌한 얼굴이었다. "약속을 어긴 대가를 알고 싶거든, 아침 일찍 동쪽 바닷물에 발을 담가 보라." 퍼뜩 깨어나니 이미 새벽이었다. 왕은 자식이 없는 것이 그녀의 저주인지 알고 싶었으므로 일어나 바다 속으로 몇 걸음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 문득 깨어난 한 기사가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바다 속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왕이 걸어들어가고 있는 수면 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자라나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긴 머리카락과 로브 자락을 휘날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바다 속에서 불쑥 솟아오르더니, 천지간을 어둠으로 가리고 왕 한 사람만을 휘감아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기사가 달려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림자는 이를 갈며 말했다. "네 부하의 만용과, 내 지나친 결벽성이 너를 살렸다." 왕이 고개를 들어보니 그림자는 손에 피투성이 이불 덩어리 같은 것을 받쳐 들고 있었다. 왕은 잠시 후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여자 마법사의 약속이 무엇을 뜻했는가도 깨달았다. 마법사였던 그녀는 아기를 가진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고, 그래서 10개월 뒤 왕이 탑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약속이 깨어지자 그녀는 자기 손으로 아기를 찌르고 말았다. 그 후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담요에서는 계속해서 검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왕은 그제야 꿈에 나타난 그녀의 초췌함 역시, 홀로 산고에 시달리고, 배신에 분노하여 살인을 저지른 황폐한 마음의 탓이라는 것을 느꼈다. 거대한 그림자 형태의 여자 마법사는 음산한 목소리로 왕을 저주하며 말했다. "반드시 첫 딸을 낳으리라. 그 딸이 내 고통에 대한 값을 치러주리라." 잠시 후 그림자는 사라지고, 주위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푸르게 개어 있었다. 여자 마법사와 몇 년을 함께 지냈던 왕은 그녀의 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예전에도 헤매던 왕을 불러 딱 적당한 정도의 대접을 했던 것처럼, 그녀의 중립적 성격은 죄가 없는 기사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왕은 고통스러운 죄책감 속에서 성으로 돌아왔다. 세월이 흘러, 왕과 왕비 사이에서 귀여운 공주가 태어났다. 공주는 아주 예쁜 금발머리와 새처럼 아름다운 목소리, 페리도트(peridot)처럼 빛나는 연녹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여자 마법사의 저주가 두려워 높은 탑을 쌓은 다음 공주를 그곳에 가두고 왕국 마법사들로 감시하게 하였다. 왕비는 더 이상 아기를 낳지 못했고, 그리하여 공주는 비록 갇히긴 했으나 더할 나위 없이 귀하게 길러졌다. 그러나 공주는 금방 바깥 세상을 궁금해하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 물었다. 더없이 총명한 자질을 타고났고 수많은 스승들과 책에 둘러싸여 모르는 것 없이 영리해졌으나, 공주는 늘 가난한 아이들처럼 밖에서 뛰어 놀게 되기를 소원했다. 열다섯 살이 된 공주의 생일날, 먼 곳에서 선물을 들고 찾아온 사람들 중에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빈손이었다. 공주가 선물이 무엇이냐고 묻자 노파는 공주가 원하는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준다고 응답했다. "난, 난 밖으로 나가 넓은 세상에서 춤을 추고 싶어." 노파는 고개를 끄덕이고 망토 안에서 킬킬거리며 웃더니 그 힘은 이미 공주의 몸 안에 들어 있다고 답했다. 다음 순간, 공주와 노파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왕은 많은 병사를 파견하여 공주의 행방을 수색하도록 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단 하나의 기쁨이던 공주가 사라지자 왕비는 병들고 왕은 시름에 잠겨 나라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공주가 떠나자 그녀가 기거하던 탑은 버려졌고, 점차 폐허가 되어 갔다. 몇 년이 흐른 후 왕은 시름을 잊지 못하고 성을 나와 방랑한 끝에 다시금 외로운 바닷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만한 광경과 마주쳤다. 여자 마법사의 탑이 서 있던 바닷가 너머 먼 바다에 신기루처럼 다시 탑이 서 있었다. 그것은 방금 물 속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미끈거리는 푸른 이끼에 뒤덮여 있어서 마치 녹색 돌로 쌓아진 탑처럼 보였다. 돌 틈에는 크고 작은 조개들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때문에 느껴지는 두려움을 제하면, 대단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탑을 본 순간, 왕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리고 근처의 뱃사람들에게 작은 배를 내게 하여 바다 가운데 선 탑으로 접근했다. 배는 천천히 탑으로 다가가다가 어느 순간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게 되었다. 뱃사람들이 물밑에는 암초도 없고 역풍이 부는 것도 아닌데 배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동안 저만치 녹색 탑의 망루에 희고 긴 옷을 입은 금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가 입은 옷은 드레스 같기도 하고 마법사의 로브 같기도 한 묘한 모양이었으며 이마에는 녹색의 보석이 박힌 서클렛이 씌워져 있었다. 그러나 멀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3년간 성실했던 대가로, 3년간 불성실했지요." 새의 지저귐처럼 아름다운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왕은 그것이 자기 딸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모습은? 왕은 발을 구르며 탑으로 접근하고 싶어했지만 여전히 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시 세 가지 대가를 치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거예요." 그녀는 후광처럼 아름다운 금발을 날리며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 대고 기원을 드리는 것 같았다. 곧 탐 주위를 맴돌던 검푸른 바닷물이 미친 듯이 들끓으며 치솟기 시작했다. "첫째 대가는 당신의 추억." 왕이 탄 배는 용케도 파도를 타 넘으며 버티었다. 그너라 바다사자처럼 사나운 파도 무리들은 머리를 곧추세운 채 왕이 떠나온 바닷가로 달려들어 예전에 여자 마법사가 살던 폐허의 탑을 삼켜버렸다. "둘째 대가는 당신의 왕국." 바다가 일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왕과 뱃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늘과 바다가 같은 빛깔로 변하고,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며 거대한 벽처럼 솟아오른 바닷물이 왕국의 숲을 덮쳐갔다. 그리고 공주가 갇혀 있던 탑을 포함하여 왕성 전체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대가는 당신의 딸." 왕은 소리질렀다. "오, 안돼!" 그러나 바닷물은 바닥이 없는 것처럼 한없이 부풀어오르더니 드디어 금발의 여인이 서 있던 녹색의 탑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왕의 애타는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탑은 낱낱이 무너지고 여인의 모습은 바다 속에 지워져 버렸다. 왕이 마지막으로 파도 속에서 들은 목소리는 '대가는 성취되었다'는 한 마디뿐이었다. 남은 것은 이제 다스릴 왕국이 없는 왕과 집을 잃은 몇 사람의 뱃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지옥 같은 폭풍우가 드디어 멈추고 햇빛이 고요한 해면을 비추기 시작하자 서서히 노를 저어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다는 거짓말처럼 얌전했고 놀랄 만큼 투명했다. 그들은 뱃전에 붙어 앉아 유리처럼 맑은 연녹색의 바다 밑으로 과거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오던 바닷가, 그리고 왕국의 아름다운 시가와 집들을 차례로 지나쳐갔다. 흰 돌로 쌓아 올린 종탐과 축제가 열리던 광장, 바닷물의 흐름에 머리카락을 맡기고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 마침내 성이 보였을 때, 왕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그곳을 떠나 더 먼 곳으로 노를 저었다. 뱃사람들의 왕이 된 왕은 해가 지는 쪽으로 노를 젓도록 명령했다. 물 위에는 뿌리쨰 뽑힌 나무들과 부서진 집의 잔해들이 떠다녔지만 곧 그런 것들도 사라지고 거울 같은 바다만이 이어졌다. 왕은 일어나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다시 갈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죄의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평온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