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룬드 타로 메이저 아르카나의 15번 카드.
2. 내용
메이저 아르카나 가운데 15번째로 등장하는 악마 카드(The Devil).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번쩍이는 핏빛의 사슬이다. 금방이라도 피를 뚝뚝 흘릴 것처럼 생생한 이 사슬은 어둡고 깊은 동굴 속에 있는 한 존재를 속박하고 있다.
사슬과 함께 카드의 주인공을 움켜잡고 있는 것은 커다란 바위다. 그의 몸은 바위 가운데 벌어진 틈새들에 단단히 끼여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어 있고 벌려진 팔다리의 끝은 마치 바위에서 자라난 식물의 뿌리처럼 깊숙이 묻혀 있다. 핏빛 사슬이 몸 위를 두 번 세 번 가로지른다.
분노로 충혈된 눈동자와 비명을 참는 듯 날카롭게 악문 이빨 사이로 보이는 것은 까마득한 세월을 버텨오면서도 한 치도 버리지 못한 악의와 질투, 배신감과 같은 감정의 올가미들이다.
그의 모습은 기괴하다. 분명 인간인데 얼굴에 검은 털들이 솟아 있으며 머리에는 두 개의 뿔과 같은 것이 나 있다.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그야말로 반인 반수, 점차 짐승의 얼굴로 변해 가는듯한 모양이다. 몸에는 한때 로브 비슷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천 조각들이 너덜거린다.
바위 아래에는 마법사의 로드(Rod)라고 생각되는 물건이 떨어져 있는데 머리 부분에 횐 보석이 박힌 구부러진 막대 모양이다. 그 밑에는 샘, 또는 거울처럼 보이는 투명한 물질이 있고 거기에 이 막대의 모양이 그대로 비친다. 그런데 거기에 비친 막대에는 검은 보석이 박혀 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두 개의 보석에는 어렴풋이 인간의 얼굴이 비친다. 그들은 모두 눈가리개로 눈을 가린 채 뭔가를 호소하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묶여 있는 남자의 이름은 니그안. 그 뜻은 ‘별빛’이며 고대 이스나미르가 멸망한 후 다시 대륙에 제대로 된 국가가 출현하기까지 지속된 긴 혼란기인 ‘잊혀진 시대(Forgotten Age)‘에 살았던 강한 마법사이다. 이름 그대로 ‘잊혀진 시대’의 역사는 오직 민간에서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몇 가지 음습한 전설들 속에서만 존재할 뿐, 구체적인 사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인간과 엘프, 드워프 등의 종족이 그 시기에 생겨났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널리 인정되는 사실일 뿐이다. 따라서 니그안의 일생에 대한 것도 그러한 전설에 의지하여 설명되는 도리밖에 없다.
‘균열(Chasm)‘이라 불리는 정체 모를 충격적 변화의 영향으로 높은 마법 문명을 이룩한 고대 이스나미르 인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그 지혜역시 거의 실전되어 버린 시기에, 니안은 자신의 힘으로 어느 정도 마법의 역사를 복원해 낸 자였다(불행히도 그가 복원한 마법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불운한 일생과 함께 모조리 암흑 속에 묻혀버렸다). 약육강식의 혼란기에 살았던 자로서 그 역시 이기적이고 오만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내밀한 경쟁자였던 자로부터, 흔히 전해지는 바와는 달리 고대 이스나미르에도 ‘악의 군주(Lord of Evil)‘라 할 만한 지하의 신적인 존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일어 친구와 함께 황무지 가운데 있는 악마의 유적으로 들어간다. 동굴의 끝에는 샘이 있었다. 니그안은 그 안을 들여다보다가 뿔이 솟은 검은 털북숭이의 괴물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마법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에서 강한 최면의 빛이 뿜어나가 샘에 부딪치는 순간, 빛은 반사되어 니그안을 덮친다.
그는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그의 몸은 바위에 매어져 있었다. 놀라는 그에게 친구가 말한다. 이 샘은 어느 누가 들여다보아도 저 괴물의 모습을 비추게 되어 있으며 자신은 그 사실을 발견하고는 일부러 저 아래에 마법을 반사시키는 특별한 거울을 가라앉혀 놓았다고. 그 자는 니그안을 죽이지 않고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기를 원했는데 그 이름 모를 자가 니그안에게 가진 원한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민담마다 여러 가지로 갈린다. 단순하게 니그안의 재능에 대한 강한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도 하고, 좀더 낭만적인 판본에서는 결혼한 니그안의 누이동생에 대해 부당한 사랑을 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이야기는 그 동굴 안에는 실제로 실체 없는 악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힘이 첫 번째 방문자인 그 자를 타락의 길로 몰아넣어 친구를 제물로 동굴에 바치게 했다는 설이다.
동굴 속에 남겨진 니그안은 악의에 사로잡혀 이를 갈았고 그가 분노를 품으면 품을수록 바위는 점차 그를 빨아들며 결국 사슬 없이도 꼼짝할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그의 삶이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고통과 적개심은 강한 파장이 되어 동굴 밖으로 흘러나갔고 수많은 생물들이 거기에 끌려 안으로 들어와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결과가 전해질 뿐이다. 그는 돌에 박힌 채 산 생명들의 미혹과 절망을 부추기는 존재가 되었고 그 스스로는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과 후회와 분노와 절망에 감금되었다.
스스로 원하지 않았고 또한 깨닫지도 못하고 있으나 그의 모습은 결국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악마’의 상징이 되었다. 그 자신이 바로 유적 안에 있다던 악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타의에 의해 묶여졌으나 스스로의 의지로 그 결박을 더욱 굳게 만들고 말았다. 기로는 그가 묶여진 바위는 악의를 버릴 때 그 몸을 풀어놓게 된다고 달리 전해지는 이야기하지만 그런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는 한, 또는 세상이 ‘끝날’까지 자신의 피를 적의와 배신감으로 데울 것이다. 또한 그는 두려워한다. 이 형벌이 끝나지 않을까봐, 그의 복수심이 보답을 얻지 못할까봐.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던 마법사의 기억이 그 속박을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악마 카드의 의미도 이와 같다. 자신이 빠져 나갈 진정한 길을 깨닫지 못한 채 무익한 절망과 분노에 굴종하며 또한 거기에 도취된 나머지 마음까지도 해방되지 못하게 만들고 마는 일.
아룬드 스프레드에서 인도자의 자리와 연관된 악마 카드란 실로 불운한 것이다. 그에게 외부에서 유입되는 영향은 끊임없는 혼돈과 악의 뿐이며 거기에 탐닉하도록 부추기는 목소리는 실로 크다. 이 잘못된 인도자에 사로잡히면 결코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낼 수 없으며 계속해서 무모한 자학에 자신을 내던지게 될 뿐이다. 애써 깨끗한 정신을 유지하고자 해도 유혹이 비처럼 쏟아져 의지를 녹여버린다. 그리하여 어느새 존재하지도 않는 적대자에 대해 이를 갈며, 있지도 않은 미래의 불운을 두려워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배신자에 대한 울분은 오직 자신의 몸을 망칠 뿐인데도.
다만 이 악마는 인도자의 자리가 뜻하듯 오직 외부에서 오고 있기 때문에 그 사슬을 자의로 풀기만 하면 내부는 순식간에 정화될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